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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소득주도성장…소득이 소득을 증가 시킨다고?

기사승인 2019.04.23  14:3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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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인류의 생존방식 변화와 ‘넓은 스펙트럼 혁명’

[CEONEWS=조장옥 교수] 100만 년 전 인류는 약 2백만~3백만 명이었고 모두 아프리카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작지 않은 부침이 있었지만 인구는 최근까지 매우 느린 속도로 꾸준히 증가하였다. 100만 년 이상 지속된 빙하기가 마지막으로 끝난 것은 약 10,000~12,000년 전이었다. 아시아, 유럽, 북아메리카를 덮고 있던 빙하가 북쪽으로 밀려가고 그 뒤를 툰드라가 따랐다. 자작나무와 가문비나무 등 침엽수의 옅은 숲이 다시 그 뒤를 따랐다. 빙하가 북쪽으로 멀리 밀려간 뒤에는 온대지방에 낙엽수와 활엽수 숲이 깊게 들어섰다. 당연히 동물들도 북쪽으로 이동하였으며 깊은 숲에 서식하는 새로운 동물들도 뒤따랐다. 그리고 그 즈음 수렵채취로 생존하던 인류의 조상들이 초기농업(proto-agriculture)을 시작하였다. 식용으로 가축의 사육이 먼저 시작되고 뒤이어 식물에 물을 주고 주위의 잡초를 제거하는 등 일종의 경작이 시작된 것이다.

구석기 시대 대부분의 인간 유적지에서는 큰 동물의 뼈가 함께 발견된다. 그런데 50,000년 전부터는 큰 동물의 뼈는 감소하고 조류와 물고기를 포함한 작은 동물의 뼈가 증가한다. 그리고 인류문명의 최초 발생지로 추정되는 근동지방에서 발견된 유적에서는 23,000년 전부터, 뒤에 경작하게 되는 밀과 보리 등 곡물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식물의 흔적이 발견된다. 수렵채취가 큰 동물 위주에서 이렇듯 다양한 먹거리로 변한 것을 『넓은 스펙트럼 혁명(Broad Spectrum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넓은 스펙트럼 혁명은 빙하기 후기 홍적세(Pleistocene)에 나타난 기후변화와 인구의 증가에 따른 남획으로 들소나 매머드와 같은 대형 동물이 사라지면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원시 인류의 유랑생활은 ‘수확체감의 법칙’ 때문

스펙트럼 혁명 이후 인류는 사냥, 물고기 잡이, 과일과 곡류의 채집 등으로 생존을 유지하였다. 이밖에 당시 인류는 씨앗, 잎과 뿌리, 조류, 뱀과 개구리, 달팽이, 유충, 곤충 등 못 먹는 것이 거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의 발견에 따르면 인류의 작은 집단이 1년에 소비한 동물과 식물은 100종이 넘었다. 물론 섭취하는 내용은 장소와 계절에 따라 달랐다. 한 장소에서 수주 또는 수개월을 머문 다음 수렵·채취를 위한 대상이 희소해지면 다음 장소로 이동하였다.

원시 인류가 한 장소에 정착하지 않고 유랑한 것은 경제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리 가운데 하나인 수확체감의 법칙(law of diminishing return) 때문이었다. 한 장소에서 수렵과 채집은 주위에 가까이 있는 동물과 낮은 가지에서 손쉽게 채취할 수 있는 과일 등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장소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면 주위의 사냥감이 감소하기 때문에 보다 멀리 나가 사냥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가지에 올라야만 하였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식량 단위당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할 수밖에 없게 되고 끝내는 이동하는 것이 머무는 것보다 생산적인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수확체감의 법칙이 나타나는 것은 고정된 생산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렵채취시대의 고정생산요소는 당연히 채집 가능한 사냥감과 목초가 자라는 토지였다.

그렇다면 수렵채취의 시대에 소득은 어떻게 측정되며 얼마일까? 고고학과 인류학 등의 연구에 따라 수렵채취시대의 영양상태가 농업이 시작된 이후보다 못하지 않았다는 연구결과는 적지 않다. 그러나 수렵채취시대의 소득을 추정한 연구는 어디에도 없다. 당시의 소득을 추정함으로써 얻는 정보의 유용성이 어디에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수렵채취시대를 살았던 인류는 소득이 무엇일까에 대하여 굳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수렵채취시대의 소득은 현재 서울의 중산층 가정이 생각하는 소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먼저 수렵채취시대에는 소득과 소비가 거의 완전히 일치하였다. 그러나 현재 서울에 거주하는 중산층 가운데 스스로 생산한 재화를 전부 스스로 소비하고 다른 사람이나 집단이 생산한 재화는 전혀 소비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다음으로 당시의 소득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생존하고 남는 것은 저장과 운반이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나아가 다른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과하게 잉여를 생산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수렵채취의 과실이 적은 것은 생존의 문제였지만 축적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소득이 많은 것이 오늘날과 같은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 서울의 중산층 가운데 생존할 만큼만 생산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수렵채취시대의 소득 측정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과 표준화된 회계의 단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현대적인 의미에서 수렵채취시대의 소득을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렵채취시대의 소득 측정

사정이 이러함에도 수렵채취시대의 소득을 이론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먼저 구석기 시대 대부분의 기간에는 사람이 매우 희소하고 멀리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재화의 교환이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재화의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는 주관적인 기준을 적용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한 달 동안 토끼 세 마리를 사냥하였고 피스타치오 열 바구니를 채취하여 소비하였다면 소득을 어떻게 추정할 수 있을까?

이 경우에는 먼저 수렵채취인의 지급의사(willingness to pay)를 추정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토끼 한 마리를 피스타치오 두 바구니와 교환할 의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두 재화의 교환비율은 1:2이다. 따라서 피스타치오로 나타낸 소득은 3·2+10=16 바구니이고 토끼로 환산한 소득은 3+10/2=8 마리이다. 이때 당시 모든 사람의 선호가 유사하다면 한 집단의 소득을 같은 방식으로 구할 수 있다. 위의 예에서 같은 기간에 주변 지역에서 사냥한 토끼가 100 마리, 채취한 피스타치오가 500바구니였다면 피스타치오로 나타낸 소득은 100·2+500=700 바구니이고 이를 토끼로 나타내면 100+500/2=350 마리이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가족이든, 부족이든 함께 생활하는 집단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웃 집단 사이에 재화 거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에는 주관적인 가치판단에 기댈 필요 없이 교환비율을 이용하여 소득을 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들소고기 한 바구니가 곡식 다섯 바구니와 거래된다고 하면 들소고기 한 바구니의 가격은 곡식 다섯 바구니이고 곡식 한 바구니의 가격은 들소고기 1/5 바구니이다. 이때 한 집단이 수렵채취를 통해 한 달 동안에 들소고기 열 바구니와 곡식 스무 바구니를 얻었다고 하면 들소고기로 나타낸 이 집단의 소득은 10+20/5=14 바구니가 된다. 그리고 곡식으로 나타낸 소득은 10⨯5+20=70 바구니가 된다. 이때 측정의 단위가 되는 재화를 뉴메레르(numeraire)라고 한다. 물론 이 경우 측정된 소득은 재화의 단위로 나타낸 것으로 실질소득(real income)이다. 그리고 실질소득에 해당 재화의 현재 가격을 곱하면 오늘날의 화폐 단위로 나타낸 수렵채취인들의 소득을 추정할 수도 있다.

오래된 과거의 소득을 추정하는 이와 같은 방법은 주관적인 가치판단 또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거래의 교환비율을 추정해야 하는 문제와 어려움을 안고 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방법으로 측정한 수렵채취인들의 소득이란 오늘날 우리가 소득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소득과 소비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는 오늘날의 소득은 달리 표현하면 구매력(purchasing power)이다. 즉 소득의 크기는 그것으로 구매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총량이다. 그러나 수렵채취인들이 사냥을 통해 획득한 고기, 채집한 식물과 곡식은 대부분 시장에 내다 팔아서 다른 무엇을 구매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소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수렵채취인들의 생산 활동은 생존이 목적이었지 교환을 통한 소득의 창출과 증대 그리고 생활수준의 향상, 나아가 그 이상의 무엇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특정 기간의 생산과 소비가 정확히 일치하였으며 부가가치의 생산은 대부분 한 단계로 완료되었다. 이와 같이 생산과 소비가 일치하는 경우에는 노동의 생산성이 소득과 분리될 수가 없다.

 

소득이 노동생산성과 분리되는 순간 노동인센티브는 왜곡

문재인 정부가 등장한 이후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기치 아래 최저임금인상, 비정규직 정규직화, 노동시간단축, 법인세와 기타소득세 인상 등 상식적이지 않은 정책들이 남발되고 있다. 소득주도성장의 핵심은 소득을 재분배하면 경제성장 곧 소득의 증가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경제학 역사에서 소득이 소득을 증가시킨다는 이론은 없다. 경제학을 잘못 배운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옳다면 그보다 쉬운 경제성장의 방법이 없을 터인데 세계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왜 경제성장이 지지부진할까?

수렵채취시대의 소득주도성장을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예를 들어 수렵채취시대에 내안델탈이라는 가족과 사피엔스라는 가족이 한 지역에 살고 있었다. 사피엔스 가족은 나무도 잘 타고 사냥 실력도 좋아서 늘 섭취하고도 남을 만큼 수렵채취의 과실(소득)이 풍부하였다. 그러나 네안델탈 가족은 그렇지 못하여 늘 과실이 부족하였다. 어느 날 동네의 힘센 누군가가 사피엔스의 소득의 일부를 네안델탈에게 이전한다고 선언하였다고 상상하여 보자. 이와 같이 소득의 재분배가 일어나면 소득이 증가할까?

이에 대한 답은 경우에 따라 다를 것이다. 먼저 사피엔스의 잉여만을 단순히 네안델탈에게 재분배하면 그 기간에는 생산량에 변화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사피엔스는 잉여를 이전한 것이기 때문에 더 채취해야할 이유가 없고 네안델탈은 부족분의 일부를 보충했으니 그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책이 시행된 다음 기간부터는 오히려 소득이 감소할 가능성이 크다. 소득의 잉여를 네안델탈에게 무상증여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피엔스가 굳이 추가적인 노동을 투입하여 잉여를 생산할 인센티브가 없어진 것이다.

만일 소득의 이전이 너무 많아서 사피엔스의 잔여소득이 생존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면 수렵채취를 위해 더 많은 노동을 투입하게 되고 소득의 증가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이 네안델탈의 소득 증가가 그들의 수렵채취활동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피엔스의 생산활동 증가와 네안델탈의 감소를 따져 보아야 소득의 증감 여부를 알 수 있다.

이때 유의하여야 할 사실은 소득의 증가가 계속해서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같은 정책이 유지된다면 한 번 증가하였거나 감소한 소득은 변하지 않고 성장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 나아가 이와 같은 소득재분배가 정의로운 것이냐는 것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노동시간의 강제적 단축 또한 문제를 복잡하게 하고 있다. 가령 생산성이 높은 사피엔스는 생존을 위해 일주일에 40시간의 노동이 필요하고 생산성이 낮은 네안델탈은 70시간이 필요하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그 힘센 사람이 일주일에 54 시간만 일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고 하면 네안델탈은 굶주릴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이러한 정책은 생산성이 높은 사피엔스에게는 영향이 없고 낮은 네안델탈에게 피해를 준다. 문 정부 들어 대부분의 경제정책이 이 모양이다. 수단으로서의 정책과 목표를 항상 혼동하고 있다. 그 결과 사회적인 약자에게 정책의 나쁜 효과가 집중되고 있다. 왜 안 된다는 정책들만 골라서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모르면 길을 물어서 가야하는 것이다.

 

경제정책의 바른 길

소득 재분배를 전혀 반대하고 싶지 않다. 앞의 수렵채취시대 예에서 보듯이 문재인 정부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소득 재분배가 노동생산성과 소득을 분리시키기 때문에 조심스럽고 현명하게 추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최저임금이나 노동 시간으로 소득 재분배를 이뤄 보겠다는 만용을 부리는 나라는 이 지구상에 대한민국 그것도 문재인 정부밖에 없다. 소득이 노동생산성과 분리되는 순간 노동의 인센티브가 왜곡된다. 그리고 온갖 부작용이 나타난다. 따라서 경제활동의 인센티브를 크게 훼손하지 않고 소득 재분배를 이룰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문 정부 아래에서 소득분배가 오히려 악화되고 있는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경제성장은 공급능력을 배양하는 것이지 수요를 흔들어 가지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생활수준 개선이 수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광기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도 그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고속도로의 건설, 포항제철, 조선업과 자동차 그리고 전자산업을 일으킨 것이 어디 수요가 일으킨 변화인가? 왜 수렵채취시대는 그토록 오래 지속되었고 인류의 생활수준은 산업혁명 이후에나 개선되기 시작한 것일까? 이제 그만했으면 됐다고 본다. 정책의 방향을 과감히 바꿔 나라 경제를 일신할 때이다. 시간은 기다리는 법이 없다.  

[조장옥 서강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전 한국경제학회 회장]

조장옥 webmaster@ceomagazi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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